MLB·디스커버리·헤지스·타임 — 한국 패션산업 재조명: 가두점의 몰락과 브랜드 인수국의 탄생 [특집]

2026-08-20 · 상한가클럽

한국 패션은 두 번 죽었다는 말을 듣습니다. 한 번은 온라인에게, 한 번은 명품에게.

그런데 올해 상반기 성적표를 열어보면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죽었다던 K패션 기업들이 일제히 두 자릿수 이익 성장을 찍고 있고, 어떤 회사는 미국 브랜드로 중국에서 명품급 이익률을 냅니다. 브랜드 이름 하나하나로 그 반전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1막 — 무엇이 죽었나

먼저 장례식부터. 2010년대까지 한국 패션의 권력은 가두점이었습니다. 동네 목 좋은 자리의 대리점들 — 그 시대의 주인공이던 수많은 여성복·남성복 브랜드가 유니클로·자라의 SPA 공습과 온라인 이동 속에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지금 목 좋은 자리는 로데오거리가 아니라 무신사 랭킹 첫 화면입니다. 임대료 대신 수수료를 내는 시대죠.

반대편에서는 명품이 승승장구했습니다. 에르메스·루이비통·샤넬, 이른바 '에루샤'의 한국 매출은 합쳐서 연 수조 원 — 백화점 1층은 이제 사실상 한국 땅이 아닙니다. 파리와 밀라노의 조차지(租借地)입니다. 자리는 우리가 내주고 돈은 그쪽이 법니다.

이 두 개의 파도 사이에서 "한국 토종 패션은 끝났다"는 부고가 여러 번 나왔습니다. 그런데 부고가 성급했습니다.

2막 — 생존자들의 상반기 성적표

올해 상반기, 주요 패션기업의 실제 숫자입니다.

| 회사 (대표 브랜드) | 상반기 매출 | 영업이익 | 증감 | |---|---|---|---| | 삼성물산 패션 (빈폴·에잇세컨즈·아미·메종키츠네) | 1조 2,498억 | 912억 | 매출 +37%, 이익 +61% | | F&F (MLB·디스커버리 익스페디션) | 9,605억 | 2,400억 | +8.6%, +15.6% | | 한섬 (타임·마인·시스템) | 7,736억 | 411억 | +7.7%, +82.7% | | LF (헤지스·닥스·바버) | 6,913억 | 비공개 | 매출 +2% | | 코오롱FnC (코오롱스포츠·시리즈) | 5,864억 | 191억 | +4.8%, +180.9% | | 미스토홀딩스 (휠라·타이틀리스트) | 3,862억(휠라) | 585억 | -10.6%, +60.7% | | 신세계인터내셔날 (스튜디오톰보이·어그 수입) | 3,337억 | 101억 | -13.1%, 흑자전환 |

공통 패턴이 보입니다. 매출은 한 자릿수 성장인데 이익이 폭발한다는 것 — 업계가 '외형 경쟁'을 버리고 할인율·재고·점포를 조이는 '수익성 경영'으로 일제히 전환했다는 뜻입니다. 몸집 자랑하다 골병들던 산업이 근육 운동을 시작한 겁니다.

3막 — F&F, 라이선스의 연금술

이 판의 최고 이야기는 F&F입니다.

F&F의 간판 MLB는 미국 야구 리그의 이름을 빌린 한국 기획 브랜드입니다. 태생부터가 역발상이었습니다 — 김창수 대표가 메이저리그 사무국의 문을 직접 두드려 "이 이름으로 패션을 만들어도 되겠느냐"고 제안해서 태어난, 서류상 라이선스일 뿐 기획·디자인·유통 전부 토종인 브랜드입니다. 야구를 팔던 사무국은 모자와 옷이 본업이 될 거라고 상상도 못 했겠죠. 미국은 야구를 수출했다고 생각했는데, 한국은 거기서 패션을 캐냈습니다.

즉 F&F는 미국 야구 모자를 한국이 디자인해서 중국에 파는 회사입니다. 문장이 이상하게 들린다면 정상입니다 — 그런데 그 이상한 문장이 영업이익률 25%를 찍습니다. 명품 빼고 이 이익률이 나오는 패션 회사는 세계에도 몇 없습니다.

결정타는 중국이었습니다. 뉴욕 양키스 'NY' 모자가 상하이 거리의 교복처럼 번지며 MLB는 중국에서 그야말로 대박이 터졌고, 수천 개 매장 없이도 조 단위 해외 매출을 만드는 브랜드가 됐습니다. 정작 미국 본토에는 이 옷을 파는 매장이 없다는 것 — 야구의 나라 사람들은 자기네 리그 이름이 아시아에서 명품 대접을 받는 걸 모릅니다.

두 번째 간판 디스커버리 익스페디션은 한 술 더 뜹니다. 다큐멘터리 채널 이름을 빌려 패딩을 팔다가, 지난해 아예 그 브랜드 글로벌 상표권을 1,100억 원대에 사버렸습니다. 세 들어 살다가 건물을 통째로 산 셈 — 이제 전 세계 어디서 팔아도 로열티가 밖으로 안 나갑니다. 올해는 중국에서 출점을 늘리면서도 할인을 안 하는 배짱 전략으로 프리미엄 이미지를 굳히는 중입니다.

이 '역인수' 계보는 F&F만이 아닙니다. 휠라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한국에 입양된 뒤 호적까지 옮긴 케이스입니다 — 한국 법인이 이탈리아 본사를 통째로 인수했고, 심지어 골프 명가 타이틀리스트(아쿠쉬네트)가 이 집 자회사입니다. MCM은 독일 브랜드를 성주그룹이 사 왔죠. 브랜드 수입국이던 한국이 어느새 브랜드 인수국이 된 겁니다.

4막 — 대기업 계보의 오늘

전통의 양대 명문도 각자의 답을 찾는 중입니다.

제일모직의 후예, 삼성물산 패션은 상반기 매출 +37%로 성장률 1위입니다. 토종(빈폴·에잇세컨즈)을 지키면서, 아미·메종키츠네·톰브라운 같은 신명품을 남들보다 먼저 수입해 키운 편집 안목이 지금의 성적표를 만들었습니다. 브랜드를 만드는 것만큼 고르는 것도 실력이라는 증명입니다.

LG패션의 후예, LF는 헤지스와 닥스라는 국산 클래식에 바버·킨 같은 수입을 얹은 포트폴리오로 조용히 갑니다. 화려하진 않지만 30년 가두점 전멸의 시대를 살아서 통과한 것 자체가 이 회사의 실력입니다.

한섬은 가장 자존심 센 길을 골랐습니다. 타임·마인·시스템 — 라이선스도 수입도 아닌 순수 토종 브랜드로 프리미엄을 고집했고, 올해 1월 시스템이 파리 갤러리 라파예트 백화점에 정식 입점했습니다. 영업이익 +82.7%는 그 고집의 이자입니다. 코오롱FnC는 조직 수술(이익 +181%)과 함께 코오롱스포츠의 중국 성공이라는 카드를 쥐고 있고요.

비전과 체크리스트

이 산업의 방향은 명확해졌습니다. 내수 가두점의 시대는 끝났고, 살아남은 자들의 다음 시험은 글로벌입니다. F&F의 중국·동남아, 한섬의 파리, 휠라의 브랜드 소유 모델 — 각자 다른 항로지만 목적지는 같습니다. K팝과 K뷰티가 열어놓은 '한국이 만들면 힙하다'는 프리미엄의 파도에 패션이 올라탈 수 있느냐가 향후 5년의 승부입니다.

투자자용 체크리스트는 다섯입니다. ①F&F의 중국 지표 — MLB 성장이 둔화하는지, 디스커버리가 이어받는지 ②이익률의 지속성 — 올해의 수익성 개선이 구조인지 다이어트 일회성인지 ③한섬 파리 매장의 리오더 — 토종 프리미엄의 유럽 검증 ④명품 소비의 향방 — 에루샤로 가던 돈이 신명품·K브랜드로 내려오는 트레이딩다운 여부 ⑤무신사의 상장 시간표 — 온라인 권력의 상장은 이 판 전체의 밸류에이션을 다시 매기게 할 이벤트입니다.

한국 패션은 브랜드를 못 만든다고들 했습니다. 반은 맞습니다 — 대신 남의 이름을 빌리고, 그 이름으로 세계에서 돈을 벌고, 끝내 그 이름을 사버립니다. 이만하면 못 만드는 게 아니라 다르게 만드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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