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럭시의 역사와 브랜드 가치 — 한국폰의 무덤, 일본에서 시작된 역습 (브랜드 경제학 ②)
1995년 3월 9일, 구미사업장 운동장. 임직원 2,000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무선전화기 15만 대, 500억 원어치가 해머에 부서지고 불에 탔습니다. 불량률 11.8%에 격노한 이건희 회장의 지시였습니다. "수준 미달 제품을 만드는 것은 죄악이다." 그 유명한 애니콜 화형식입니다. 넉 달 뒤 애니콜은 모토로라를 제치고 국내 1위에 올랐습니다.
삼성 휴대폰 브랜드의 역사는 이렇게 자기 제품을 불태우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품질에 대한 결벽 — 이것이 이 브랜드의 유전자라는 걸 기억하고 시작하겠습니다. 이 유전자는 21년 뒤 훨씬 비싼 방식으로 다시 발현됩니다.
와인 라벨에서 태어난 이름
2008년의 옴니아를 기억하시는 분이 있을 겁니다. 아이폰에 맞서겠다며 나왔다가 느린 속도와 무리한 마케팅으로 참패한, 삼성이 지우고 싶어 하는 이름입니다. 절치부심 끝에 2010년 갤럭시 S가 나왔고, 1년도 안 돼 1,000만 대가 팔리며 제국이 시작됐습니다. 참고로 '갤럭시'라는 이름은 임원들이 어느 와인 라벨의 'Galaxy'라는 단어가 고급스러워 보여 골랐다는 전직 부사장의 증언이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이름 중 하나가 와인병에서 왔다는 얘기지요 ^^;
2011년에는 5.3인치 갤럭시 노트를 내놨습니다. 언론은 "냉장고만 하다"고 조롱했지만 9개월 만에 1,000만 대가 팔렸고, 3년 뒤 애플이 아이폰6 플러스로 따라오면서 조롱은 표준이 됐습니다. 카테고리를 창조하는 것 — 브랜드가 할 수 있는 가장 비싼 일을 노트가 해냈습니다.
그리고 2016년, 노트7. 발화 사고에 삼성은 출하 250만 대 전량 리콜, 두 달 만에 아예 단종이라는 초강수를 뒀습니다. 회사 추산 총 7조 원대의 수업료. 하지만 원인을 배터리 결함으로 공개 규명하고 8단계 배터리 안전검사를 만들어 다음 제품부터 적용했습니다. 화형식의 유전자입니다. 태워야 할 때 태우는 브랜드는 신뢰를 잃지 않습니다.
한국폰의 무덤에서 걸어 나오다
이제 이 브랜드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대목, 일본입니다.
일본은 오랫동안 '한국폰의 무덤'이었습니다. 세계 1위 갤럭시가 유독 일본에서만 점유율 3.4%(2016년, SA 기준)까지 추락했습니다. 오죽하면 2015년부터 8년간 일본에서 파는 갤럭시에는 SAMSUNG 로고를 떼고 'Galaxy'만 새겼습니다. 말하자면 이름표를 떼고 등교한 전학생입니다. 세계에서 제일 공부 잘하는 학생이, 이 학교에서만큼은 성이 알려지면 불리할까 봐 이름 반쪽을 가리고 다닌 겁니다.
2023년 로고를 당당히 복귀시켰지만 반등은 로고가 아니라 제품이 만들었습니다. 폴더블입니다.
| 일본 시장 | 시점 | 수치 |
|---|---|---|
| 점유율 바닥 | 2016년 | 3.4% (SA) |
| 로고 복귀 | 2023년 | 6.3% (IDC) |
| 3위 복귀 | 2025년 연간 | 11.0%, 5년 만의 3위 (MM종합연구소) |
| Z폴드8 출시 | 2026년 8월 | 온라인 전 모델 품절, 전작의 2배 판매 |
| 일본 폴더블 시장 | 2026년 | 삼성 점유율 60.4% |
지난달 일본에서 Z폴드8이 품절 대란을 일으켰습니다. 세계에서 아이폰 점유율이 가장 높은 나라(과반 4년 연속)에서 일어난 일이고, 일본 폴더블 신규 구매자의 60%가 10~30대 젊은층입니다. 현지 반응 중에는 접히는 폰이 "카와이(귀엽다)"라는 평이 있는데, 생각해 보면 아이폰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종류의 칭찬입니다 ㅎㅎ 아이폰의 안방에서 아이폰에 없는 물건으로 젊은 세대를 데려오는 것 — 무덤에서 걸어 나오는 방법으로 이보다 정석은 없습니다. 올해 2월에는 소프트뱅크에 재입점하며 2015년 이후 처음으로 일본 3대 통신사 유통망도 완성했습니다. 이름표를 다시 단 전학생이, 반장 선거에 나갈 채비를 하는 중입니다.
세계 5위 브랜드의 역설 — 형이 벌면 동생이 맞는다
인터브랜드 평가에서 삼성은 905억 달러, 세계 5위입니다. 2020년부터 6년 연속 톱5를 지킨 유일한 아시아 브랜드입니다. 애니콜 화형식의 해(43위, 2000년 기준 52억 달러)에서 보면 상전벽해입니다.
그런데 올해 이 세계 5위 브랜드에 기묘한 일이 생겼습니다. 2026년 2분기, 갤럭시를 만드는 MX사업부가 매출이 14%나 늘고도 사업부 출범 이래 첫 분기 적자(-7,000억 원)를 냈습니다. 범인이 공교롭습니다. AI 서버발 메모리 가격 폭등 — 스마트폰 원가의 약 20%가 메모리인데, 그 메모리 값을 올린 주인공이 다름 아닌 같은 회사 반도체 부문입니다. 같은 분기 삼성전자 전사 영업이익은 89.5조 원 신기록이었고, 그중 89.2조 원이 반도체였습니다. 형이 사상 최대로 버는 동안 동생은 형이 올린 재료값에 얻어맞은 셈입니다.
투자자의 눈으로 — 갤럭시의 값은 어디에 매겨져 있나
여기서 1편 코카콜라의 질문이 돌아옵니다. 브랜드 가치와 회사 가치는 같은 것인가.
애플과 삼성의 인터브랜드 브랜드 가치 격차는 5.2배(4,709억 vs 905억 달러), 시가총액 격차는 약 3.9배입니다. 그런데 내용이 다릅니다. 애플 시총은 사실상 브랜드(스마트폰 세계 매출의 49%를 가져가는 가격결정력)가 설명하지만, 삼성전자 시총과 PER 11배는 대부분 메모리 사이클이 설명합니다. 세계 5위 브랜드 갤럭시는, 말하자면 형 이름으로 등기된 집에 사는 동생입니다. 등본을 아무리 뒤져도 동생 지분은 따로 안 나옵니다. 반도체가 좋으면 반도체 주가가 되고, 반도체가 나쁘면 반도체 주가가 되는 회사 — 그게 시장이 삼성전자를 보는 방식이고, 출하량 세계 1위(2026년 2분기, IDC) 브랜드의 값은 그 등본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걸 디스카운트로 볼지, 언젠가 풀릴 보너스로 볼지는 각자의 판단입니다. 다만 하나는 분명합니다. 일본에서의 역습이 보여주듯, 이 브랜드는 아직 성장 서사를 쓰는 중입니다. 브랜드는 순위표가 아니라 현금흐름표에 산다고 1편에서 말씀드렸는데, 갤럭시는 거기에 한 줄을 보탭니다.
브랜드의 값은 그것이 홀로 설 때 비로소 매겨집니다.
다음 편은 예고대로 정반대의 사례입니다. 브랜드 순위표에서는 여전히 세계 최상위인데 회사 가치가 무너지고 있는 독일 자동차 3사 — 브랜드는 비싼데 회사는 싸지는 이야기입니다.
※ 본 글은 공개 자료(삼성전자 IR·인터브랜드·카운터포인트·IDC·MM종합연구소 등) 기반의 정보 제공 목적이며, 특정 종목의 매수·매도 추천이 아닙니다. 시장 점유율은 조사기관·기간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