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차세대 컴퓨팅 ④ 칩렛 — 반도체가 '한 덩어리'를 포기하고 레고가 되기로 한 이야기
앞의 세 편에서 이런 흐름을 따라왔습니다. 전기가 모자라고(①), 구리선이 막히고(②), 미세공정이 벽에 부딪히자 위로 쌓기 시작했다(③).
오늘은 그다음 질문입니다. 위로 쌓을 거면, 애초에 왜 하나로 만들었나?
큰 집 한 채 vs 방 여러 개
예전 반도체는 큰 집 한 채였습니다. CPU도 그래픽도 입출력도 전부 한 장의 실리콘에 새겼습니다. 이걸 모놀리식(monolithic), 우리말로 '한 덩어리'라고 부릅니다.
문제는 집이 커질수록 하자 확률이 올라간다는 겁니다.
반도체 웨이퍼에는 먼지 한 톨만 앉아도 그 자리 칩은 불량입니다. 그런데 칩이 크면 그 먼지 한 톨이 큰 칩 하나를 통째로 날립니다. 30평 집에 물이 새면 30평이 손해지만, 5평짜리 방 여섯 개면 물 샌 방 하나만 버리면 됩니다.
칩렛은 그 5평짜리 방입니다.
기능별로 작은 조각(다이)을 따로 만들고, 나중에 붙여서 하나처럼 쓰는 방식입니다. 불량이 나도 그 조각만 버리면 되니 수율이 올라가고, 조각마다 다른 공정을 쓸 수도 있습니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요즘 AI 칩은 손바닥만 합니다. 그 크기를 한 덩어리로 만들면 수율이 처참합니다. 만들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팔 수 있는 가격이 나오느냐의 문제였고, 칩렛이 그 답이 됐습니다.
AMD가 먼저 웃었습니다
이 방식으로 판을 뒤집은 회사가 AMD입니다.
2017년 라이젠부터 CPU 코어 부분과 입출력 부분을 따로 만들어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엔 "꼼수 아니냐"는 말도 들었습니다. 한 덩어리가 정석이고 조각을 붙이는 건 어딘가 급조한 느낌이었으니까요.
결과는 다들 아시는 대로입니다. 인텔이 한 덩어리를 고집하며 공정 전환에 발목 잡혀 있는 동안, AMD는 조각을 조합해 코어 수를 빠르게 늘렸습니다. 서버 시장 점유율이 한 자릿수에서 두 자릿수로 올라간 배경에 이 설계 방식이 있습니다.
지금은 인텔도 같은 길입니다. 최신 서버용 제온에 조각을 3차원으로 직접 붙이는 기술을 넣었고, 컴퓨팅 조각 16개에 메모리 24단을 얹은 스마트폰만 한 패키지까지 시연했습니다. 한 덩어리를 고집하던 회사가 조각의 개수를 자랑하게 된 겁니다.
표준이 없으면 레고가 아닙니다
여기서 진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조각을 붙인다는 건 좋은데, 회사마다 붙이는 방식이 다르면 결국 자기 조각끼리만 붙일 수 있습니다. 그건 레고가 아니라 그냥 회사별 조립품입니다.
그래서 만든 게 UCIe라는 규격입니다. 조각과 조각 사이의 연결 규격을 업계가 통일하자는 약속입니다. 콘센트 모양을 통일하는 것과 같습니다. 220V 규격이 정해지고 나서야 가전제품 시장이 커진 것처럼요.
2025년 말에 나온 3.0 규격의 숫자는 이렇습니다.
| 항목 | 내용 |
|---|---|
| 전송 속도 | 64GT/s — 직전 세대의 두 배 |
| 조각당 대역폭 | 최대 4TB/s급 |
| 연결 거리 | 100mm까지 — 큰 패키지 안에서 멀리 떨어진 조각끼리도 통신 |
이 규격이 자리를 잡으면 A사 연산 조각에 B사 메모리 조각, C사 통신 조각을 붙이는 그림이 가능해집니다. 반도체 업계가 조립 PC 시대로 가는 셈입니다.
물론 아직은 이상에 가깝습니다. 규격이 있다고 실제로 남의 조각이 잘 붙는 건 다른 문제입니다. 콘센트가 같아도 전압이 다르면 기기가 타죠. 지금은 규격 위에서 각자 자기 조각을 만드는 단계이고, 진짜 혼합 조립은 그다음 이야기입니다.
한국의 자리 — 이번엔 조금 다릅니다
앞선 세 편에서 한국의 위치는 대체로 비슷했습니다. 설계는 미국, 제조·조립은 대만, 한국은 메모리와 장비.
칩렛에서는 결이 조금 다릅니다. 한국이 파는 것이 이미 칩렛이기 때문입니다.
HBM을 생각해 보십시오. 메모리 다이를 여러 층 쌓아 하나처럼 쓰는 물건입니다. 이름만 안 붙였을 뿐 개념상 칩렛 방식이고, 이 시장은 한국 두 회사가 사실상 양분하고 있습니다. 칩렛 시대가 온다는 건 HBM을 얹을 자리가 계속 늘어난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는 파운드리입니다. 삼성은 올해 초 말레이시아 설계자산 회사를 생태계에 들여 4나노 공정에서 32GT/s급 UCIe 3.0 연결 회로를 쓸 수 있게 했습니다. 고객이 삼성 공정 위에서 곧바로 칩렛 설계를 시작할 수 있게 판을 깐 겁니다. 공정만 파는 게 아니라 공정+설계자산+패키징을 묶어 파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세 번째가 재미있습니다. 국내 AI 반도체 회사가 칩렛으로 정면 승부를 겁니다. 리벨리온의 차세대 칩은 조각 4개를 붙여 엔비디아 H200급 성능을 더 낮은 전력으로 낸다는 설계입니다. 큰 칩 하나로 정면 대결하면 자본과 공정에서 밀립니다. 조각을 잘 조합하는 쪽으로 우회하겠다는 전략인데, 다윗이 골리앗과 씨름하지 않고 다른 종목을 고른 셈입니다.
네 번째는 장비입니다. 조각을 붙이려면 결국 정밀하게 붙이는 기계가 필요합니다. 이 대목은 관련주편에서 종목 단위로 펼치겠습니다.
정직하게 — 칩렛이 만능은 아닙니다
세 가지는 짚고 갑니다.
하나. 조각을 붙이면 그 사이에 신호가 오가야 하고, 거기서 전력과 지연이 생깁니다. 한 덩어리보다 항상 빠른 게 아닙니다. 붙이는 손실보다 수율 이득이 클 때만 남는 장사입니다.
둘. 붙이는 공정 자체가 어렵고 비쌉니다.
③편의 첨단 패키징이 그래서 병목이 됐습니다. 조각을 잘 만들어도 붙일 자리가 없으면 못 팝니다.
셋. 표준이 곧 시장 개방은 아닙니다. 대형사들이 규격을 만들면서도 실제로는 자사 조각 위주로 갈 가능성이 큽니다. "누구 조각이든 붙는다"는 그림은 몇 년 더 걸립니다.
관전 포인트
- UCIe 3.0을 실제 양산 제품에 쓰는 사례가 몇 개나 나오는가 — 규격 발표와 양산 채택 사이의 거리가 이 테마의 속도를 결정합니다
- HBM 다음 세대에서 조각 수가 얼마나 늘어나는가 — 한국 메모리 두 회사의 물량과 직결됩니다
- 삼성 파운드리가 칩렛 고객을 몇 곳 확보하는가 — 공정 경쟁이 아니라 플랫폼 경쟁으로 넘어갔습니다
- 붙이는 장비의 수주 흐름 — 관련주편에서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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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덩어리를 포기하는 결정은 반도체 업계에서 꽤 큰 항복 선언이었습니다. 더 작게 만들어 성능을 올리던 50년짜리 공식을 접고, 조각을 잘 붙이는 쪽으로 방향을 튼 것이니까요.
그런데 산업의 판이 바뀔 때는 늘 이런 식이었습니다. 정석이 막히면 편법으로 보이던 것이 새 정석이 됩니다.
*이어지는 [관련주편]에서 이 판의 종목 지도를 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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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공개된 기술·산업 정보를 정리한 정보 제공용 콘텐츠이며, 특정 종목의 매수·매도를 권유하지 않습니다. 투자 판단과 그 결과의 책임은 투자자 본인에게 있습니다.*